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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08 일본 기업의 손실처리와 향후 파장
출처: http://blog.chosun.com/article.log.view.screen?blogId=6037&logId=3688249
조선일보 일본 특파원 선우정 기자

전 요즘 일본 제조업을 보면 무섭습니다.

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대로 발표하는 적자 규모가 대단합니다. 마침 같은 날 아침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자체 집계를 했습니다. 일본 제조업 전체가 사상 최초의 적자를 냈다는 것입니다. 1조엔 규모, 우리 돈으로 15조원 정도의 전체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돼 있군요. 세계적 불황+엔화가치 급상승의 이중고가 실적에 그대로 반영되는 듯합니다. 또 일본의 회계연도는 오는 3월까지이기 때문에 한국 기업이 작년 실적에서 반영하지 않은 올해 1분기 적자 규모가 반영돼 있습니다. 작년 4분기보다 훨씬 안 좋은 시기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규모가 커도 이 정도로 일본 제조업이 쇠락하는 수준은 아닙니다. 제가 정말로 무서운 것은 천문학적 적자를 서슴없이 공표하고 있는 일본 제조업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물론 사실대로 발표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 이상입니다. 경쟁적으로 적자를 불리는 듯합니다. 일본 자동차를 상징하는 도요타, 전자를 상징하는 파나소닉(일본에서 사무라이 전자기업의 대표는 우리가 생각하는 소니가 아니라 파나소닉입니다)이 4000억엔대의 최종 적자를 눈깜짝 안하고 발표하고, 히타치는 무려 7000억엔의 일본 제조업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내부의 동요는 크지 않습니다. 수많은 비정규직이 잘려나가는데, 공장 정문앞 피켓 시위 이상의 소요는 없습니다. 대형 적자에 큰 영향을 미친 엔고를 잡으려는 일본 정부의 노력도 거의 없습니다. 왜일까요?

현재 일본 경제계에선 "일본 기업이 손실 처리를 당기고 있다"는 평가가 기정사실화돼 있습니다. '역(逆)분식' 우려 때문에 어떤 언론도 이 가능성을 공론화하지 않지만,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손실 요인을 이번 회기에 반영해 털어버리려는 움직임입니다.

가장 최근에 실적을 발표한 대표 전자기업 파나소닉을 예를 들어 보지요.

3800억엔의 최종적자를 발표했습니다. 도요타(3500억엔)보다 많은 금액입니다. 한국 돈으로 5조7000억원에 달합니다. 파상적 설비투자를 단행한 초박형TV의 가격 하락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모양입니다. 하지만 파나소닉은 일부러 적자를 낸 것입니다. 주력 사업이 손실을 입었다고 해도 영업손익은 600억엔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왜 3800억엔의 최종 적자를 계상했을까요?

지금 일본 제조업이 발표하는 2009년 3월기(2008년 4월~2009년 3월) 실적 예상에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것이 '구조조정 비용'이란 부분입니다. 이 비용을 간과하고 넘기면 일본 제조업은 그저 세계적 불황의 파도 속에서 허위적거리는 듯 보일 뿐입니다. 파나소닉은 3450억엔의 구조조정 비용을 계상했군요. 히타치는 1500억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전기 9사의 전체 적자 1조9100억엔 중 구조조정 비용이 7466억엔을 차지합니다. 구조조정 비용은 무엇일까요? 적자를 일으키는 낙후 공장을 폐쇄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손실, 그리고 인력을 감축하는데 소요되는 퇴직금과 위로금 비용 등입니다. 파나소닉의 경우 전체 설비의 20%를 줄이고 전 세계에서 1만 5000명을 감축하는 구조조정 비용을 당겨서 회계처리한 것입니다. 전자기업만 구조조정을 연기했다면, 산술적으로 일본 전체 제조업 적자는 2500억엔 수준으로, 즉 4분의 1로 줄어듭니다. 자동차, 기계, 중공업 등 다른 기업의 구조조정 비용을 합치면 일본 제조업은 사실 적자가 아닐 것입니다

파나소닉은 1990년대 나카무라 사장 체제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해 기사회생한 기업입니다. 그 때 이미 일본식 종신고용 전통은 파괴됐지요.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지만 일본의 제조업 종신고용은 1990년대 이후 장기불황을 거치면서 전체적으론 무너졌습니다. '정규직'에 한정해 도요타와 혼다 등 대표 사무라이 기업이 위대한 유산을 지키고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도요타와 혼다가 일본인의 '정신'으로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최근 정규직을 대상으로 대규모 감원을 실시하는 기업들은 이미 장기불황 시기에 칼바람을 일으킨 기업들입니다. 나카무라식 경영을 '파괴와 창조'라고 말하는데, 지금 모든 일본 제조업체가 우선 자신을 파괴하는 작업에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합의, 1995년 미일 무역전쟁의 와중에서 지금과 같은 '엔고' 위기를 겪습니다. 그 때마다 자신을 파괴했고, 그 때마다 위기를 넘겼습니다. 지금은 세계 시장에서 엔고 위기를 넘기기 위한 사상 3번째 자기 파괴를 단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1980년대 이후 일본 제조업은 미국이나 한국 제조업과 싸운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엔고'라는 물결과 싸우면서 성장했습니다. 1980년 달러 당 262엔이던 환율은 지금 달러당 89엔입니다. 엔고에 대항해 끝없이 자기를 파괴하면서 합리화를 한 것이지요. 한국 제조업이 경험하지 못한 '도전과 응전'의 세계입니다.

앞으로 이런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지요.

엔고는 장기적으로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예상입니다. 하지만 외환시장은 1~2년을 단위로 한 단기적 관점에서 일반적 예상이 거의 들어맞은 적이 없을 만큼 가변적입니다. 만약 올해와 내년 엔고가 엔저로 역류한다면?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빅3를 살리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신흥국 통화에 대한 강한 달러 기조를 시정하려고 한다면? 엔-달러 동반 약세, 신흥통화 강세는 얼마 전까지 몇년 동안 당연시됐던 흐름이었습니다. 그 순간, 구조조정을 끝낸 일본 제조업은 '몬스터'로 돌변해 한국을 공격할 것입니다.

지금 한국 제조업은 하늘에 운명을 맡기고 있습니다. 엔고가 엔저 기조로 뒤바뀌는 순간, 지금 일본 제조업이 겪는 고통보다 훨씬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지금 일본 경제계에선 삼성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 제조업이 가능한 범위에서 손실을 이월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대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못드리지만 특히 현대차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일본인들의 시기? 질투? 마타도어?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사람을 자르는 구조조정을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과 기업이 함께 무너지는 것은 더욱 비극입니다. 

우리는 일본 제조업이 아니라 한국 제조업을 정말로 심각하게 걱정해야 합니다. 칼바람이 일어나는 일본에서, 불안하게 느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을 에워싼 외부의 공기는 여전히 음산하고 어둡습니다.


Posted by trig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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